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니발 바르카 (문단 편집) === 인품 === 한니발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이는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 기록한 '''당대의 편향되지 않은'''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서는 그의 행적을 토대로 추측하는 수 밖에 없다. 로마의 사료에도 한니발의 인격에 대한 평가는 상충되는 내용이 많다. 대체로 로마의 역사가들은 한니발이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고 기록했다. 한니발의 실제 인성과 별개로 로마인들은 그렇게 느꼈을 수밖에 없긴 하다. 한니발이 로마에 있어 무시무시한 적이었던 데다 그가 이탈리아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리비우스도 한니발이 잔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또다른 로마인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 호평했다. 그는 한니발이 키살피나에서 월동하면서 로마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주고 로마의 동맹시 시민들은 몸값도 안 받고 해방시켜 줬다고 기록했다.[*출처1-3 폴리비오스, 역사, 3.33] 한니발이 잔혹했다는 기록에도 구체적으로 그가 벌인 잔혹한 군 행적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가 전쟁 수행과 무관한 학살을 벌인 정황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사군툼이나 로마의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당대 지중해 문명의 보편적인 포로 처분법이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미 칸나이 대승 후 포로로 잡은 군사들을 가지고 로마에 몸값 협상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로마가 몸값을 내기를 거부해서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즉, 이건 로마의 책임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니발은 그 정도의 로마 포로들을 지속적으로 수용할 물자가 부족했다. 오히려 한니발은 최소한 아군에게는 모질게 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호평이 지배적이다. 사료에는 일관적으로 그가 부하를 감화시키는 인품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니발이 젊은 나이에 히스파니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의 주군과 주민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정 때도 한니발의 용병들은 보급도 받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특히 포에니 전쟁이 벌어진 고대에는 전세가 불리하거나 대우가 안 좋을 때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목이 따인 장수가 한 둘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이런 충성심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그를 [[제2차 포에니 전쟁]] 내내 따르던 고참병 1만 5천은 자마 전투에서 단 한 명의 투항 없이 그를 위해 싸우다 전멸했다.] '''그것도 금전적인 관계 외에는 전혀 혈연이라곤 없던 용병과 고용주의 관계였는데도 말이다!''' 용병술의 천재라고 불렸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조차도 병사들의 파업 및 종군 거부를 당했는데도, 열악한 적지 한가운데서 싸우던 한니발은 이런 기록이 없다.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거나 그의 리더십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진작에 로마가 줄 보상에 눈이 먼 불평분자에게 밤중에 머리를 도둑질당해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을 테니... [[용병]]들로부터 이런 충성심과 복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니발의 지도력은 고금을 넘어 매우 드문 케이스. 순전히 잔혹함만으로는 급료도 제때 지급하지 못 하는 용병들을 적지에서 이끌고 한두해도 아닌 무려 17년을 싸우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한니발은 최소한 같은 편은 인간적인 대우를 넘어 깊게 감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로마사 논고》에서 한니발을 극도로 잔혹한 장군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을 대조적인 유형의 장군으로 놓고 비교했다. 그는 스키피오가 고결하고 인자해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면, 한니발은 잔혹함과 공포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서술이라고 보기 힘들다. 애초에 그의 로마사론은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정치학]]책에 가깝다. {{{#!folding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중】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그곳은 즉시 그의 우방이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부 그의 인정과 자비가 이끌어낸 결과였다. >반면에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활용했다. '''그는 잔혹함, 폭력, 약탈, 그 외의 온갖 기만술을 사용했지만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성취한 것과 같은 결과를 성취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략) >사람은 두 가지 주된 자극에 이끌리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과 두려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사랑이나 두려움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을 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 >(중략) >사랑을 받으려는 열망이 너무도 강력한 사람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비열한 사람이 되고, 두려움을 안기려는 열망이 너무도 거대한 사람은 중도를 넘어서게 되면 불쾌한 사람이 된다. 정확히 중용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처럼 월등한 능력으로써 지나친 사랑 혹은 지나친 두려움에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했다. >두 지휘관의 영광은 이미 언급했다. 스키피오는 스페인에 있던 그의 군대가 동맹의 일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피해를 보았다.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가 두려움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야망으로 통하는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그 즉시 인정 많은 지도자를 향한 사랑은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병사들과 동맹이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스키피오는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그동안 피해 왔던 잔혹한 조치를 일부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그의 잔혹함과 기만으로 인해 손해를 본 특정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나폴리와 많은 다른 도시들이 로마인들에게 충실한 채로 남은 것은 그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무자비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그 어떤 적보다 그를 혐오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피로스를 독살해 주겠다는 인물을 오히려 피로스에게 알려 주었지만, 한니발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군대를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도 로마인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따라서 한니발은 무자비하고, 신뢰할 수 없고, 잔혹했다는 이유로 이런 불이익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모든 역사가가 칭찬했던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다양한 부류의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서로 간에 알력이 일어나거나 한니발 본인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한니발이 안겨준 두려움이 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 자체도 너무나 큰데, 한니발의 출중한 능력이 가져온 명성까지 더해지니 병사들은 압도되어 단결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두 위대한 지휘관 중 한 사람은 선한 행동으로, 한 사람은 악한 행동으로 같은 결과를 달성했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21 中}}} 오히려 그가 부하들을 배려한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많다.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다. >"하루는 한니발이 야영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병사들은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한니발이 깨지 않도록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조용히 하며 그곳을 지나갔다." 여담으로 한니발은 여성 관계도 깔끔했다. 흔히 다른 정복자들이 여성 편력을 발휘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니발은 여성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거나 절제력이 높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